마르 9:30-37 30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일러주셨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35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36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실감 너머에서 어린 시절 집에서 작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어요. 참 귀여워 해주었고 유년시절의 긴 시간을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커다란 들 고양이와 싸우다 둘 다 한날 에 죽었어요. 그 들 고양이를 잡는다고 친구들과 몽둥이를 들고 산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가 지금 집에서 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마도 그때의 기억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무서운거지요. 그래서 주위의 동물들을 보면서 그냥 귀여워 해주고, 적당한 사이를 유지하며 눈으로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슬프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사람들은 사랑하는 무언가가 갑자기 없어져 버리고, 부서져 버렸을 때 많이 힘들어하고 심지어 배신감까지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힘든 기억을 갖기 싫어합니다.
제 경우와 마찬가지로 애당초 깊이 사랑을 주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아요. 그 상실감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이야기를 이해 못하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들도 그랬겠지요. 자기의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그 사실을 덮으려합니다.
길에서 자기들 중 누가 높은지 실랑이 한 것도 실은 여태 들어본 적 없었던 예수님의 말씀에 동요되고 불안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그 사랑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일방적인 집착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겠지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게 바라는 것. “더 겸손해져라. 더 많이 섬겨라. 더 비워내라.”
이 말씀이 우리 삶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더불어 함께...
■ 오늘의 기도 당신의 뜻이 우리 모두의 삶속에서 드러나고 의미를 가지게 하소서.
|